[김선옥, 문학과 나홀로 세계여행14] 뉴욕여행 4와 마야 앤젤루의 ‘새장에 갇힌 새’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19/03/08 [15:05]

[김선옥, 문학과 나홀로 세계여행14] 뉴욕여행 4와 마야 앤젤루의 ‘새장에 갇힌 새’

남정현 기자 | 입력 : 2019/03/08 [15:05]

 

뉴욕여행 4와 마야 앤젤루의 새장에 갇힌 새

 

 

▲ 김선옥 원광대 교수    

 

센트럴 파크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59번로에 면한 남쪽 입구에서 할렘으로 이어지는 110번로 북쪽 입구까지 총 4.1km, 성인걸음으로 쉬지 않고 걷는다 해도 한 시간이 훨씬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운동하러 온 것도 아닌데 앞만 보고 서둘러 걸을 이유가 없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주인공 홀든이 학교를 그만두고 뉴욕에서 방황하는 동안 돌아다니던 남쪽 연못과 동물원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말고도 벨베데어 성, 셰익스피어 가든 등 동화같이 아름다운 명소들이 박물관 근처에 줄지어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것들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예쁜 숲과 정원을 지나 북쪽 할렘 방향으로 걸어가니 케네디 대통령 영부인 이름을 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센트럴 파크 전체 면적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이 거대한 저수지는 1862년부터 130년간 맨해튼에 생활용수를 공급했다고 한다. 이제 노후화되어 근처 호수와 연못에 물을 공급하는 용도로 바뀌었지만 저수지 주변으로 나 있는 산책길과 조깅 트랙은 맨해튼 시민들에게 여전히 보물단지로 보였다.

 

▲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 저수지를 감싸는 나무 그늘 아래에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산책 나온 동네사람처럼 저수지 오른쪽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북쪽 초원지대와 숲을 통과하여 한 시간쯤 더 걸어가니 드디어 할렘 호수 표지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수 근처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흑인인 것으로 보아 공원 북쪽 입구에 도달한 것이 분명했다.

 

과연 110번로에 면한 센트럴 파크 북쪽 출입구를 벗어나자마자 말콤 엑스도로가 중앙에 나타났다. 이 도로를 따라 죽 걸어 내려가면 할렘의 번화가인 125번로 마틴 루터 킹도로에 이른다. 5번가 왼쪽 웨스트 할렘에 속한 이 구역은 과거 우범지역의 오명을 벗고 흑인문화의 중심지이자 새로운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주로 흑인들이 모여 살았던 할렘은 오랫동안 가난과 범죄 지역이라는 오명으로 외지인에게는 기피 대상이었지만, 90년대 이후 대대적인 범죄소탕이 이루어졌고 공공도로와 건물이 정비되면서 오늘날 소울음악재즈클럽’, ‘소울음식등 흑인문화의 중심지로 재탄생했다. 물론 5번가 오른쪽에 있는 이스트 할렘은 여전히 밤에는 위험하다고 하니 그쪽은 좀 더 안전해지면 방문하시길!

 

▲ 센트럴 파크 북쪽 출입구와 마주하는 할렘 입구의 모습  

 

미국 흑인문학 연구로 박사논문을 썼고 여행 당시 마야 앤젤루(Maya Angelou)에 대한 논문을 구상하고 있던 나는 뉴욕의 흑인 거주지 할렘(Harlem)을 꼭 방문해 보고 싶었다. 앤젤루가 201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남부에 있는 웨이크 포레스트(Wake Forest)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뉴욕에 올 때마다 머물던 집이 할렘 웨스트 120번로에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시인이자 작가였고, 가수, 배우, 교수, 인권운동가로서 오바마 부부와 오프라 윈프리의 멘토로도 유명한 마야 앤젤루는 많은 시와 에세이와 명언들, 그리고 7권에 달하는 자서전을 남겼다.

 

그 중 첫 번째 자서전인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엄마, 나 그리고 엄마』 『딸에게 보낸 편지가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다. 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인종분리 하에 있던 남부에서의 성장담을 다룬 그녀의 첫 번째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백인의 인종차별에 그녀와 함께 치를 떨었고, 8살에 겪은 성폭력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그녀의 실어증처럼 나도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으며, 할머니와 엄마와 이웃 여성의 도움으로 그녀가 흑인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본격적으로 부당한 인종차별에 용감하게 맞설 때 그녀와 함께 통쾌함을 느꼈었다.

 

▲ 마야 앤젤루 (사진출처=구글)    

 

 

흑백 인종을 다르게 대하는 한국사회, 우리는 인종주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내 안에 집요하게 새겨진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흑인문학에 관심을 가졌건만 내가 그것으로부터 정말 자유로워졌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흑인문학을 공부한 덕택에 나는 내 안의 인종주의가 자라나지 못하도록 감시할 수 있었고, 미국사회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백인들이 저지른 미국사회의 부정의를 바로잡고 인종차별이라는 악습에 용감하게 맞서는 앤젤루와 같은 흑인들의 저항이 마틴 루터 킹이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흑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인의 영혼을 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인류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는 일이라고 믿는다.

 

 

말콤 엑스도로를 따라 걷다가 신문기사에서 보았던 앤젤루의 집 120번로 58번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기사에 따르면 앤젤루가 2002년에 대략 5억 정도로 구매했던 집이 50억 넘는 가격으로 매물로 나왔다고 한다. 브라운스톤(Brownstone)이라 불리는 적갈색 사암으로 1910년대에 지어진 4층집을 앤젤루가 사들여 대대적으로 수리한 뒤 오프라 윈프리를 비롯하여 많은 유명 인사들과 교제를 나눈 곳이니 그녀의 사후에 분명 집값이 폭등했으리라.

 

어쨌든 맨해튼 도로는 남북을 애버뉴(Avenue)로 동서를 스트리트(Street)로 분할해 놓고 나머지는 개별 건물에 번지수를 붙이기 때문에 주소만 알면 집 찾기는 아주 쉬웠다. 한 눈에 봐도 할렘의 부유한 구역으로 보이는 120번로 골목으로 들어서니 58번 번지수가 크게 쓰여 있는 그녀의 집이 보였다.

 

▲ 할렘 웨스트 120번로 58번지, 마야 앤젤루가 살았던 집. 오른쪽은 120번로 주택가 골목이다.  

 

앤젤루는 떠나고 없지만 그 골목길을 수도 없이 걸었을 그녀의 흔적을 느끼며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 125번로를 따라 걸었다. 자유롭고 개성적인 옷차림을 한 흑인들이 대부분인 그 도로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아시안 여성이었지만 가끔 미소를 보내며 지나가는 사람들 외에 불편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이클 잭슨을 포함하여 유명한 뮤지션들을 배출했다는 유서 깊은 아폴로 극장까지 걸어간 후 오바마도 방문했다는 유명한 실비아’(Sylvia)식당에서 남부의 흑인 소울음식을 먹는 것으로 할렘 여행을 마무리했다.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에 놀라고, 그럼에도 저렴한 가격에 감사하며 할렘 여행을 안전하게 마무리했다.

 

▲ 할렘 중심가인 125번로에 있는 아폴로 극장. 1872년 처음 세워졌고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흑인 뮤지션의 데뷔 무대가 되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