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문학과 나홀로 세계여행19] 세인트루이스 여행과 T.S. 엘리엇의 ‘황무지’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19/08/12 [22:55]

[김선옥, 문학과 나홀로 세계여행19] 세인트루이스 여행과 T.S. 엘리엇의 ‘황무지’

남정현 기자 | 입력 : 2019/08/12 [22:55]

 

세인트루이스 여행과 T.S. 엘리엇의 황무지

 

▲ 김선옥 원광대 교수    

 

워싱턴 D.C.에서 세인트루이스(St. Louis)로 직행하는 버스는 없었다. 자동차로 달려도 14시간 거리. 그토록 먼 곳에, 인기 여행지도 아닌 중서부 도시까지 가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우선은 마크 트웨인의 고향인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한니발(Hannibal)을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20대에 만나 대학원을 함께 다니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 절친이 13년째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남편 유학길에 동행했다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50도 안되어 머리가 하얗게 샐 만큼 고생하며 눈물 한 바가지는 쏟았을 그녀. 그녀가 뒤늦게 학위를 마치고 미국 대학에 100번도 넘게 지원서를 넣은 끝에 기적처럼 조지 메이슨 대학에 임용되어 곧 이사할 예정이었다. 그녀가 세인트루이스에서 보내는 마지막 3일을 나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 대학시절에 만난 25년 지기 친구. 뒤에 보이는 건물은 모자이크 실내 장식으로 유명한 세인트루이스 바실리카 대성당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로널드 리이건(Ronald Reagan)공항에서 세인트루이스 공항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비행 중에 여행지로서의 세인트루이스를 탐색해보니 그 역사적 배경이 매우 흥미로웠다.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이 합류하는 현재의 세인트루이스 지역에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이들은 당연히 인디언들이었지만 1673년 프랑스 탐험대가 이곳에 도착한 이래 백인 식민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로 세인트루이스를 기점으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북으로는 오대호, 남으로는 멕시코 만, 동서로는 애팔래치아 산맥과 로키 산맥 사이에 있는 광활한 지역이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4세 이름을 따 루이지애나(Louisiana)로 불렸다.

 

그러나 1803년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그 유명한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으로 나폴레옹으로부터 겨우 1500만 달러를 주고 이 지역을 사들여 미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폴레옹이 황무지 땅이라며 버렸던 루이지애나는 현재 세인트루이스가 속해 있는 미주리 주를 포함하여 미국 15개주를 품고 있는 거대한 영토이다. 전쟁에서는 영웅이었을지 몰라도 미래를 내다볼 능력까지는 없었던 나폴레옹의 어이없는 실책!! 그러나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 세인트루이스를 지나가는 미시시피강, 세인트루이스 항구는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 세 번째로 붐비는 큰 항구였다. 17세기 프랑스 탐험대의 출발 지점이기도 했다.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경계도시, 미시시피 강으로 찾아든 초기 탐험가뿐만 아니라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향했던 개척자들이 통과해야 했던 관문의 도시 세인트루이스. 서부 개척이 먼 과거의 추억으로 남은 21세기에 세인트루이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지하철은 아주 소박했고 표를 끊는 곳도 받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표지판을 따라가니 바로 시내로 가는 지하철을 타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료 서비스인 듯 했다!

 

친구가 학교 일을 마칠 때까지 미시시피 강변 탐색에 나서니 세인트루이스 어디서나 보인다는 192미터의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가 웅장한 모습으로 미시시피 선착장 근처에서 나를 맞이했다. 미시시피 강 너머 서부로의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1965년 세워졌다는 세계 최고 높이의 게이트웨이 아치는 이름 그대로 서부로 향하는 관문의 상징으로 세인트루이스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 세인트루이스 Gateway Arch. 엘리베이터로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요란한 소나기를 뚫고 게이트웨이 아치 근처로 나를 픽업하러 온 친구의 모습이 보이자 반가운 눈물이 솟구쳤다. 낯설고 먼 도시에 와서 25년 지기 친구를 만난 그 느낌, 그 반가움과 안도감! 이사 준비로 정신없던 그녀는 지도교수가 준비한 환송회에 나도 함께 초대받았다고 했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어색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미국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식사 분위기가 궁금해서 따라가 보았다. 한 눈에 편안하고 소탈하면서도 지적으로 보이는 리사 교수는 내가 그녀의 가정집을 구석구석 구경하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그녀의 남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20세기 현대시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은 시인 T.S. 엘리엇이 고교 시절에 살았던 집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집은 주차장으로 바뀌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주소가 있으니 그곳도 가보라고 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라는,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그 유명한 문구로 시작하는 황무지(The Waste Land)의 이미지가 착상된 곳이라고도 했다.

 

오 마이 갓! 마크 트웨인의 고향이 세인트루이스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세인트루이스가 그토록 유명한 시인의 고향인 줄 몰랐다. 엘리엇은 192739세의 나이에 영국으로 귀화해서 흔히 영국 시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소설을 전공한 나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 20세기 현대시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 T.S. Eliot (사진 출처=구글)    

 

과연 구글로 검색해보니 엘리엇은 보스톤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한 명문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후 하버드와 소르본느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불문학을 공부하고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까지 능통했던 20세기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가 감정보다는 이미지와 지성에 호소하는 모더니즘 최고 시인이 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1922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황무지1차 세계대전 후 황폐화된 유럽을 정신적 불모지로 상징화하여 현대 문명을 비판하고 인간 삶의 구원을 모색한 433행의 장시로 20세기 모더니즘 대표하는 현대시로 평가받는다. 시인뿐만 아니라 비평가이자 극작가로도 뛰어났던 엘리엇은 19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1939년 발표했던 그의 우화 시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는 유명한 뮤지컬 캣츠로 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삿짐 상자가 켜켜이 쌓여 있는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그녀의 차로 세인트루이스 탐색에 나섰다. 당연히 엘리엇이 살았다는 집부터 찾아보았다. 친구가 살던 동네에서 자동차로 겨우 10여분 거리에 있어서 그녀도 깜짝 놀랐다. 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국에서 영문학을 했는데 13년 가까이 살면서 엘리엇의 집이 그토록 가까이에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엘리엇 기념관도 박물관도 아닌 누군가가 살고 있는 보통 가정집이었으니 전공을 바꾼 친구 눈에 띄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엘리엇이 미국을 버리고 영국으로 귀화한 탓일까. 로버트 프로스트나 에드가 앨런 포의 집처럼 주정부에서 관리하는 독립된 기념관이 아니라 현재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가정집 입구 바닥에 부착된 동판에 그에 관한 짧은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긴 조야한미국 문명에 염증을 느끼며 영국으로 귀화했는데 미국 정부에서 그의 기념관을 만들어줄 이유는 없을 터였다.

 

▲ 엘리엇이 16세부터 하버드에 입학하기 전까지 살았다는 집. 현재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의 생가가 있었던 주소지를 찾아가니 리사의 남편이 말해준대로 철책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주차장이 방문하는 이도 없이 도로변에 방치돼 있었다. 엘리엇 생가가 있던 자리라는 표시조차 없는 그 황량한 풍경이 묘한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엘리엇의 전기를 쓴 크로포드(Crawford)따르면 실제로 엘리엇은 어린 시절의 고향을 방문했다가 황량한 주차장으로 변한 동네 모습에서 황무지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엘리엇의 다른 시에서 그런 암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 엘리엇의 생가가 있었던 세인트루이스 2635 Locust Street의 모습.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차장으로 변한 엘리엇의 동네에서 차를 돌려 친구와 함께 1904년 세계박람회 개최 기념으로 조성된 세인트루이스의 명소 포레스트 파크(Forest Park)로 향했다. 광활한 녹지대에 조성된 동물원, 미술관, 호수 등은 뉴욕 센트럴파크 못지않았다. 게다가 전부 무료!! 4천만이 넘는 조각의 모자이크 장식으로 유명한 바실리카 대성당도 화려함과 장엄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친구가 내 덕분에 처음으로 제대로 세인트루이스를 여행했다며 웃었다. 원래 자기 동네를 여행지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렇게 친구와 유쾌한 하루 여행을 마치고 그녀가 13년간 살아온 클레이튼(Clayton)이라는 동네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크레페리에(Creperie)로 가서 커피와 함께 주문한 두 종류의 크레페는 소박한 겉모습과 달리 정말 기절할 만큼 맛있었다.

 

스물여덟에 만나 오십이 넘은 세월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와의 동행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으리라. 세인트루이스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친구에게 감사! 이제 그 먼 이국땅에서 쏟은 눈물 거름삼아 꽃길만 걸으시길, 친구여.

 

▲ 주로 백인들이 거주하는 클레이튼 동네 모습과 유명 카페 Creperie의 대표 메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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