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범의 우수마발1] 우수마발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0/08/31 [14:45]

[윤관범의 우수마발1] 우수마발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0/08/31 [14:45]

 

우수마발             

 

▲ 칼럼니스트 윤관범    

 

소 오줌과 말똥. 우수마발의 사전적 의미로 하찮은 존재와 별 볼 일 없는 글을 일컫는다. 1970년대 중고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성어(成語)를 알 것이고 대부분은 양주동의 수필에서 처음 보았을 것이다. 나처럼. 그래서 처음엔 3인칭을 대신하는 한자어로 알고 한참을 지내다가 원 뜻을 알고 난 후엔 나도 우수마발에 속하는구나.” 씁쓸해했다. 그러나 삶의 출발점에 다시 선다 해도 우수마발을 선택해야지 그것도 사료나 항생제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수마발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요즘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내 살던 고향은 중구 만리동. 대여섯 살부터 30대 초반까지 벗어나 본 적 없던 마포구 아현동. 속속들이 서울 사람으로 살며 내가 본 서울의 변화는 지금 돌이켜보니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엔 몰랐다. 그냥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 새 아침을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먹던 곳이 서울에도 많았으니 그동안 우리는 참 빠르게 많이도 변했다. 고등학생이 되면 어느 날 문득 부모보다 내가 훨씬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때론 부모를 한 수 아래로 접고 대하던 시절이었으며 대학이라도 다니게 되면 이미 부모는 안중에도 없었다. 세상은 온통 무지개를 향해 줄달음질치는데 부모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우수마발이었다.

 

세상은 아직도 미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더 빠른 속도로. 때론 멈춰 서서 변화의 방향을 조망하고 때론 이룩한 변화의 과실을 즐기고 싶건만 세상은 틈을 주지 않는다. 최고였다가 금방 우수마발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외가 있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최고를 발명하고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누릴 수 없지만 그 방향에 대해선 토를 달 수 없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들 뿐. 심지어 그들은 우리의 선택도 결정한다.

 

우리의 선택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이 설계한 선택의 미로에 갇힌 걸 우린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상품 선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무서운 것은 그 손들의 은둔술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앞선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신과 같다. 도처에 심지어 우리 안에도 항상 있으니 우린 그들을 보지 못한다.

 

최근 그들 중 일부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보이차란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중국 운남성에서 생산하는 보이차는 우수마발이었다. 심지어 운남 사람들은 차나무를 베어내고 옥수수나 고무나무를 심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보이차의 우수성이 점차 알려지고 거기다 대만 장사치들의 장난이 더해져 이제 보이차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이차도 상품이니 당연히 종류가 많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탐닉하는 것은 수백 년 된 큰 나무에 사람이 올라가 잎을 따고 이후 모든 과정을 옛날처럼 모두 사람이 하는 고수차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보이차를 아는 사람들은 이 좋은 고수차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이젠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아예 차산을 사버리는 탓에 우수마발들은 마실만한 차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 천년 고차수

 

아무리 고수차라 해도 우수마발이었던 보이차가 이리도 귀한 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한다면 기계보다 인간의 손길이 귀하고 인간의 손길보다 자연의 매만짐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인간의 손길을 전혀 타지 않은 야생차는 마시기에 여러 문제가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자연이 주도하고 인간은 옆에서 거드는 협업이다. 재배형 고차수라 부르는 차나무 말이다.

 

 

우리 주변에 과거의 보이차처럼 우수마발 취급받고 있는 것은 없을까? 식물이나 상품이 그러할진대 과거의 보이차처럼 우수마발 취급받는 사람은 없을까? 소중한 존재들이 세파에 견디다 못해 귀한 고유의 속성을 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세상의 변화는 정신없이 빠르니 곧 제대로 된 대접을 받게 될 터인데 그만 버티기 힘들어 세상의 흐름을 좇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끝끝내 자신을 지킨다 한들 그래서 그 귀중함을 세상이 인지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 가치를 인정받자마자 우리와는 영영 이별인 것을.

 

10년 전 영월 외진 곳 산기슭을 사고 올해 집을 지었다. 코로나가 다시 세를 펼치는 8월 이사를 했다. 산이 좋아서지만 영월을 선택한 것은 그곳이 아니 여기가 여러 면에서 우수마발인 까닭이었다. 또 다른 보이차가 되기에 충분한. 작은 땅이지만 내가 차지하고 있어야 보이지 않는 손들의 독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품고 있다. 이곳이 보이차처럼 된다면 그 가치를 향유하고 싶은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좀 유치한 생각 말이다. 가능하면 가꾸지 않고 자연이 빚는 대로 인정하고 그저 옆에서 시중이나 들 속셈이다. 게으른 내겐 무척 어울리는 일이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잠시 글의 흐름에서 벗어나 정리도 할 겸 머리도 식힐 겸 밖에 나가 골바람을 맞았다. 7월에 개망초가 흐드러졌는데 이젠 노란 달맞이꽃만 눈에 들어온다. 번식력 강한 잡초라 우수마발 취급이지만 저들도 언젠가는 제 가치를 인정받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 달맞이꽃 

 

사실 세상에 우수마발 아닌 것이 어디 있고 우수마발인 채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내가 1인칭이고 네가 2인칭이며 나머지 우수마발이 다 3인칭이라고? 내가 우수마발이며 그러니 나도 3인칭에 속한다는 생각을 가진지 좀 되었다. 더 나아가 모든 우수마발도 나름대로 전부 1인칭이고 또 우리 각자에게 2인칭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는지. 보이지 않는 손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는 없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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