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범의 우수마발2] 마지막 이사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0/09/16 [18:22]

[윤관범의 우수마발2] 마지막 이사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0/09/16 [18:22]

 

마지막 이사

 

▲ 낯선 일상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고 있으나 아직 익숙하진 않다. 피어오르는 구름과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산, 산, 산. 이 풍광을 무덤덤하게 둘러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칼럼 내용 중) 


10년 전 영월에 땅을 사고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60m 기슭에 올해 집을 지었다. 코로나가 다시 퍼지고 이상기후에 대한 두려움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8월 말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아마 마지막 이사가 아닐는지. 아내와 아들은 첫날만 함께하고 한 달 가까이 혼자 지내고 있다. 낯선 일상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고 있으나 아직 익숙하진 않다. 피어오르는 구름과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산, , . 이 풍광을 무덤덤하게 둘러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지지난 주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작은 선물을 들고 인사차 14집을 방문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 이 외진 산골에 들어와 살려 하는가? 그것도 혼자서.” 이사 오기 전 친지들도 많이 하던 질문인데 그게 참 답하기 애매하다. 그들 마음속에 이미 답이 있고 그 답은 그들의 수십 년 삶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몇 마디 나의 언설로 그들을 주억거리게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산이 좋아서요흰소리나 하며 그저 웃을 수밖에.

 

누군가 진정 궁금해 묻는다면 나란히 앉아 지는 해 바라보며 변하는 하늘색 따라 하나하나 풀어 놓을 수 있겠다. 묻지 말고 수긍도 하지 말고 잠시 머무는 바람처럼 그저 들어주면 더 좋겠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시공간이 모두 다르니 그런 절묘한 순간이 그리 쉬 찾아올까? 그러고 보니 가족들은 누구 하나 묻지 않았다. 이사를 앞두고 생필품을 골라 주면서도 아내는 아무 말 없었다. 짐 싸는 것을 도와주던 아이들도 마찬가지. 짐을 꾸리며 내내 울컥울컥 마음이 이상하던데 가족들도 나와 같았을까? 내 마지막 이사, 혼자 살고자 하는 나의 선택. 글로나마 그들에겐 이야기하는 것이 도리인 것 같다. 이 글을 그들이 보게 되리란 확신은 없지만.

 

은퇴하고 1년 반, 가족들과 함께하며 예전부터 가졌던 생각이 더 굳어졌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가족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나를 예민하게 인지하곤 했다. 작년과 올해, 가족들과 더 밀착된 생활을 하며 기생의 정도가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살림을 버거워하는 아내에게 나라도 짐을 덜어주고 싶었고 다 큰 아이들에게도 아비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자유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별의 연착륙이라고 할까? 가족이라도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첫째 주자는 나일 가능성이 크다. 가끔 얼굴이야 보겠지만 이렇게 떨어져 살면서 나의 부재에 가족들이 서서히 익숙해지다 보면 영영 헤어짐의 충격도 완화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옹색한 변명인가?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가족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그들은 언제나 내 거울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일해본 적 없다. 항상 동료와 함께였고 그들 역시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남들에게 투영된 나의 여러 모습은 충분히 보았다. 나에 대해 새로운 것도 알게 되었고 때로 그들이 보여주는 내 모습에 억울할 때도 있었다. 가끔 산에 올라 해넘이를 바라보며 짧지 않은 시간 혼자 앉아 있거나 빗물에 젖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불쑥 생경한 나를 느끼고 흠칫했던 적이 있다. 너무 짧은 순간 다가왔다 사라져 항상 아쉬웠다. 오래 옆에 두고 보고 싶었다. 상대적인 나는 충분히 보았으니 이젠 나에게만 집중하며 내 눈으로 나를 보고 싶었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벌써 나를 한 번 만났던 것도 같다. 비 내리는 오후, 처마에서 떨어진 빗물에 흙이 튀어 오르고 처마선 따라 파인 작은 흙구덩이를 따라가다 문득 내가 낯설어졌다. 너무 낯설어 그대는 뉘신가요?” 대화도 가능할 정도였다. 어찌하면 또 다른 나를 불러낼 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에 또 불쑥 만나게 되겠지. 만남의 횟수가 잦아지면 늘 함께 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둘이 하나 되어 조금이라도 전과 다른 내가 된다면 공부를 하려 한다. 어느 공부가 끝이 있겠냐만 이 공부는 정해진 과정도 없고 그냥 깨우치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교과서도 없는 공부. 죽기 전 끝마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 시작하는 것으로도 의미는 있으리라. 마음 밖에 법이 없다 하니 마음을 닦거나 그 마음도 없다면 있다고 생각하는 타성을 깨뜨리거나 하여튼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산책길에 만난 익모초 짙은 보라로 피어오르고 있다. 그도 선생일지 모르니 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조심스럽다.

 

▲ 어찌하면 또 다른 나를 불러낼 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에 또 불쑥 만나게 되겠지. 만남의 횟수가 잦아지면 늘 함께 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칼럼 내용 중)

 

삼면이 산으로 막힌 막다른 곳, 마지막 이사한 여기에 적잖은 시간과 돈을 들였으니 적어도 내가 수긍할 만큼은 이곳에서 살았으면 한다. 그래서 이곳에 온 목적 근처에라도 가 보았으면 좋겠다. 전화벨 소리가 나를 흩어놓는다. 아내의 전화다. 된장찌개 끓이는 비법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다. 메모장에 받아 적으며 연애할 때처럼 아내의 말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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