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범의 우수마발4] 묵언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0/11/23 [10:52]

[윤관범의 우수마발4] 묵언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0/11/23 [10:52]

 

▲ 말하지 않는다고 말이 증발되는 것은 아니다. 두서없는 언어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곰삭는다. 개울과 함께 구르는 돌처럼 잠시 한눈팔면 없어졌다 잊고 지내다 보면 저만큼 다시 떠오른다. 그렇게 쌓인 덩어리들이 한 무더기 되어 저들끼리 버석거린다. (칼럼 내용 중)  © 남정현 기자


평생을 도시에서 살다 산중에서 혼자 지낸 지 3개월째다. 이곳은 D. H. Lawrence의 표현을 빌리자면 “my own nowhere”. 다른 이들에겐 그저 그런 나만의 곳이다. 낮엔 가을이고 밤엔 겨울. 딱히 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지만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이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그렇고 설렘의 대상과 농도가 좀 더 선명해진 것이 그렇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많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고 말이 증발되는 것은 아니다. 두서없는 언어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곰삭는다. 개울과 함께 구르는 돌처럼 잠시 한눈팔면 없어졌다 잊고 지내다 보면 저만큼 다시 떠오른다. 그렇게 쌓인 덩어리들이 한 무더기 되어 저들끼리 버석거린다. 조심스레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뒤죽박죽 나의 과거가 보이고 그동안 보고 들은 것 그리고 그것들에 덧칠한 내 생각의 조각들이 바글거린다. 어떤 것은 너무 열없어서 슬며시 내려놓으려 하지만 그런 것일수록 잘 떨어지지 않는다. 안에 쌓아 묵히지 않고 바로 입 밖으로 뱉어냈던 경솔함과 천박함이 그대로 돌아와 넌지시 묻는다. “어때?”

 

과거를 들추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새삼 생각도 언어가 매개라는 걸 알게 된다. 과거의 언행을 반추하며 내 안에서 떠오르는 느낌을 언어로 치환하는 작업. 느낌은 분명한데 생각이 자꾸 공전하는 것은 아마 느낌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없는 언어의 한계인 듯하다. 느낌의 폭과 깊이를 포괄하기에 언어의 범위는 너무 협소하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같이 바람이 심한 날, 솔숲을 헤집고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바람 소리, 잎이 땅 위를 구르는 소리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표기하든 아마 정확한 소리 그 언저리 어디쯤이거나 아예 잘못된 표현일 가능성이 많다. 바람은 내가 조금만 방향을 바꾸어도 소리가 달라진다. 어쩌면 바람과 주변과 듣는 이가 바람 소리를 만드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듣는 각자 다른 소리를 언어로 바꾸며 우리는 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지.

 

언어는 세상을 가르기도 한다. 한 번 나누기 시작하면 자꾸 다른 것이 보이고 그러니 더 세세히 나누기 위해 더 많은 기준이 필요해진다. 언어의 의미는 자꾸 축소되는 것이다. 이제 언어를 내려놓고 내 안에 스쳐 지나가는 느낌들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묵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그동안 모든 것에 지독하게 선을 그으며 끝없이 나누기만 했던 고질병에서 해방될 것 같다. 생각하지 않고 바라보기. 보는 것도 생각의 변종이라면 그냥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그동안 두텁게 둘러놓았던 그 많은 여과지를 하나하나 벗겨내기. 묵언을 강요하는 산중생활이 내게 주는 소중한 귀띔이다.

 

하지만 아직은 찾아주는 이 있으면 설렌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을 확인하고 그들이 내게 주는 언어의 향연 속에 앉아 있는 것은 엄청난 충만감을 준다. 주로 들으며 의미보단 소리와 표정에 집중한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말을 해야 할 때면 더듬더듬 눌변이지만 오고 가는 소리가 노래같이 들려 흥겹다. 주고받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언어로는 정확한 소통이 불가능하니까. 중요한 것은 같이 앉아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연결된 끈이 있어 내가 당기든 그들이 당기든 함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떠나면 남기고 간 흔적과 울림을 묵언 속에서 한동안 바라보고 듣는다.

 

요란하게 울어대던 벌레들은 자취를 감추고 밤하늘엔 별이 부쩍 가까워졌다. 저 많은 별 중 몇은 이미 거기에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반대로 거기에만 있고 여기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으리라. 내가 뱉어낸 말들은 그리고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디까지 존재하고 있을까?

 

▲ 주고받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언어로는 정확한 소통이 불가능하니까. 중요한 것은 같이 앉아 서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연결된 끈이 있어 내가 당기든 그들이 당기든 함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떠나면 남기고 간 흔적과 울림을 묵언 속에서 한동안 바라보고 듣는다. (칼럼 내용 중)  © 남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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