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범의 우수마발5] 선생님은 소설가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0/12/22 [17:36]

[윤관범의 우수마발5] 선생님은 소설가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0/12/22 [17:36]

 

선생님은 소설가

 

▲ 코로나로 학교생활이 많이 줄어들었을 올해, 선생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소설 쓰기 힘들었을 것이다. 거짓말도 무슨 근거가 있어야 꾸역꾸역 써나갈 텐데 아무 재료 없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마 절필 선고를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 않았을까? 드물게 큰 어려움 없이 학생들의 삶을 술술 그려내는 선생님들도 있긴 하다. (칼럼 내용 중) 

 

날 찾아온 아이의 어색한 얼굴에 긴 파장의 햇빛이 가득했으니 아마 늦은 오후였을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 그 아이보다 더 어색했을 표정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며 몇 년 동안 그의 행적에 대해 들어 온 소문이 쏜살같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졸업 후 계속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 두 번인가 합격했는데 최종 면접에서 계속 떨어진다는 이야기. “선생님이 걔 학생부에 공무원은 적합하지 않다고 쓰셨다면서요.” 그의 근황을 전해주던 아이가 말미에 박아버린 대못 하나.

 

그는 매사에 불성실했다. 학교에는 꼬박꼬박 왔지만 늦잠으로 지각하기 일쑤였고 무엇보다 주변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항상 조소의 빛이 담겨 있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작성하던 분주했던 시간. 4년 차 교사였던 난 그의 학생부, 진로희망 칸을 앞에 두고 1주일 넘게 고민했다. 그의 부모도 그도 공무원을 장래희망으로 적어 놓고 있었다. 3년 내내. 과거 담임교사들은 학생의 희망대로 지도함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학생부는 학생을 사회에 소개하는 기록물로서 정확해야 하지만 학생의 성장 잠재력도 감안해야 한다는 학생부 기록 지침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 아이의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나의 고민은 깊어 갔다. 선배 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도 하였으나 이거다 싶은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적절하지 않음. 다른 진로를 모색하는 것이 좋을 듯함.’ 고민 끝에 그의 학생부에 기록한 내용이다. 이러니 공무원 최종 면접에서 나의 기록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항변하기 위해 찾은 것이라면 난 뭐라 해야 할지 연결되지 않은 생각들이 뒤범벅되어 상투적인 인사말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그도 별말 없이 주섬주섬 봉투에서 뭔가를 꺼내며 쭈뼛쭈뼛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공무원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고. 세무공무원이라고. 신원보증 해 줄 사람 2명이 필요한데 선생님이 해 줄 수 있냐고. 아무 말 없이 바로 펜을 들고 보증서에 내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빚 갚는 심정으로. 퇴근 후 그와 시간을 가지며 나의 과거 판단에 대해 사과했다. “야속했지?” 내 물음에 처음엔 그랬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적잖이 긴장이 풀린 내가 이제 빡빡한 공무원 생활 어찌 할 거냐며 농을 하자 프로잖아요. 학교 다닐 때 월급 받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농으로 받는 그가 무척 고마웠다.

 

30여 년 전 학교생활기록부를 둘러싼 이야기다. 그때는 그랬다. 한 학급에 60명이 넘는 아이들. 그들의 학생부를 유심히 바라보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고 그래서 대충 작성하든 소신껏 기록하든 그다지 큰 문제는 없었다. 교사의 개별적 판단을 존중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부를 중심으로 하는 전형이 생기고 분위기는 급작스레 바뀌었다. 전국에서 모인 입학사정관들과 입시 담당 교사들이 1달 동안 연수를 하며 대학의 요구 사항과 고등학교의 준비 상황을 조율할 때만 해도 학생부종합전형은 우리 교육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책으로 해마다 학생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바뀌어도 과도기에 따른 당연한 시행착오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학생부종합전형의 숨은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변질된 것이었겠지. 출발은 순수하였으나 불순한 누군가에겐 파고들 틈이 많은 기회의 장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특목고 아이들을 아무 눈치 보지 않고 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자사고까지 생기면서 일반고 아이들에게 할당된 몫은 대폭 줄어들었다. 한 대학에서 입학사정관 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들었던 그 대학 입학처장이 무심코 던졌던 말. “대학이 뽑고 싶은 학생은 졸업하고 모교에 발전기금 낼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러려면 번듯한 기업에 취직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요즘엔 부모의 영향이 절대적이죠.”

 

소위 일류대학이라 칭하는 곳은 바라보지 않더라도 요즘 학생들이 느끼는 학생부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성적도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적이 어떻게 변하는지, 특정 과목군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지 story가 있어야 한다. 각 교과 선생님들이 써주는 과목별 세부특기사항도 그 story를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 학생부를 꼼꼼하게 읽어 보시라. 잘 쓴 학생부는 한 편의 소설이다. 3년 동안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 어떤 학문적, 비교과적 노력을 하였는지, 어떤 위기가 있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뿐만 아니라 인성은 또 얼마나 훌륭하고 바른지. 인재 아닌 학생 없고 어떤 경우는 거의 성인에 버금간다.

 

그러니 요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담임교사가 누군지 엄청 신경 쓴다. 심지어 학급을 바꿔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문장력 있는 교사, story-telling에 뛰어난 교사를 원하는 것이다. 말이 좋아 story-telling이지 거짓말 아닌가? 과거에 비해 학급당 인원은 절반 이하로 줄어도 교사들의 노동 강도는 몇 십 배 늘었다. 일 년에 30편 정도의 소설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시 써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교육이 서비스업이 된 지 오래니 교사도 소비자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학생부를 기록하는 교사들이나 그 학생부를 평가하는 교수들이나 자신들이 10대였을 때 꿈도 꾸지 못했던 것으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이다. 10대에 자신의 인생 항로를 정하고 그 꿈을 위해 관련된 사람을 만나며 관련된 사회활동을 했던 이가 얼마나 될까? 과연 대학은 이런 학생부 기록을 믿기는 하는 걸까? 계층화된 사회에서 좀 더 좋은 계층에 속하는 아이들을 모셔가기 위해 대학은 학생부라는 눈가리개로 우리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로 학교생활이 많이 줄어들었을 올해, 선생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소설 쓰기 힘들었을 것이다. 거짓말도 무슨 근거가 있어야 꾸역꾸역 써나갈 텐데 아무 재료 없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마 절필 선고를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 않았을까? 드물게 큰 어려움 없이 학생들의 삶을 술술 그려내는 선생님들도 있긴 하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학부모들이 떠받드는 인기 소설가다. 내심 자신이 쓴 소설을 뿌듯해하며 동료들에게 연수를 통해 자신의 기법을 전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머리를 쥐어짜며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고통 속에서 학생부 빈칸을 채워 나가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 못지않은 개연성이 있다. 소설 속에서 우린 살아 숨 쉬는 사람을 만나고 그가 경험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선생님들이 쓰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그들이 그린 인간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학생부에 그려진 인물이 거짓이란 걸 다 안다. 대학은 전국에서 모인 소설을 매년 검토하니 거짓된 교육 생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두 모르는 척, 아닌 척하며 왜 좀 더 세련되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냐며 서로에게 손가락질한다. 교사는 무슨 거짓말을 해야 하나 골머리 썩을 시간에 학생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현란한 가상세계를 만드는데 진 빼지 말고 기본에 충실한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대학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대입 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가 골수에 박힌 그들이 과연 스스로 그럴 수 있을까?

 

짝짓기 철이라 그런지 밤만 되면 이산 저산 고라니 울음소리가 엄청나다. 어떤 놈은 산울림으로 돌아온 자기 소리에 환장해 더 목청을 돋우기도 한다. 쓸지 않고 일부러 남겨 놓은 뒷마당 눈밭에 고라니 발자국 선명하다. 때가 되면 짝을 찾게 되고 필요하면 인가에도 찾아드는 고라니처럼 아이들도 때가 되면 누군가를 만나 변하고 누군가와 무언가를 하며 새로워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선 유해동물이지만 지구로 시야를 넓히면 고라니는 보호종이다. 바람직한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인식도 고라니를 바라보는 우리와 세계의 시각 차이인 것만 같아 씁쓸하다. 우리 교육이 바뀌지 않는다면 교육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정의하거나 더 이상 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 쓸지 않고 일부러 남겨 놓은 뒷마당 눈밭에 고라니 발자국 선명하다. 때가 되면 짝을 찾게 되고 필요하면 인가에도 찾아드는 고라니처럼 아이들도 때가 되면 누군가를 만나 변하고 누군가와 무언가를 하며 새로워지기 마련이다. (칼럼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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