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범의 우수마발9] 메타포(Metaphor)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1/06/02 [12:09]

[윤관범의 우수마발9] 메타포(Metaphor)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1/06/02 [12:09]

 

메타포(Metaphor)

 

▲ 훗날 우리 손에 삶의 메타포 하나쯤 들려있겠지. 하나 텃밭 갈무리하다 쥐어 든 돌덩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저 툭 던져버릴 일이다.



자연과 삶은 아날로그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눈길도, 눈길 따라 들어와 번지는 느낌도 나름 아날로그다. 이를 언어로 소통할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의 생래적 한계. 아무리 정교해도 언어는 디지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어가 놓칠 틈새를 메우기 위해 처음부터 인간은 비유를 언어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유는 먹물 같아 듬뿍 찍어 화선지에 옮기면 종이 골 따라 퍼지며 틈새를 어느 정도 메워주니까. 내가 메타포를 비유 중 으뜸으로 치는 까닭이 바로 이 번짐의 넓이가 가장 크다는 데 있다. 어쩌면 아담이 최초에 모든 것을 명명(命名)할 때 그가 부른 이름 자체가 메타포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어는 메타포로 시작된 것이다.

 

언어와 삶이 메타포였던 아득한 과거와 달리 요즘 메타포의 영역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축소되었다. 신선함을 잃고 죽어버린 메타포 더미 위, 그 협소한 공간에서만 메타포의 흔적을 찾는 우리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이 싫든 좋든 일단 외면하기 힘든 대상을 만나면 오랜 되새김 뒤에 메타포라는 옷을 입힌다. 시시콜콜 설명할 중노동을 피할 수 있고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 밖에 내뱉는 순간 쾌감이 따르고 온전히 소화해내는 사람을 만나면 짜릿한 감전의 선물을 덤으로 받는다.

 

메타포가 성공하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대상의 함수가 관련성이 멀수록 효과적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잠시 어리둥절한 뒤 아하무릎을 탁 칠 수 있는 독해를 허용해야 한다. 하지만 소수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도 그들 사이에서만 메타포로 기능할 수 있다. 배타적인 메타포는 그래서 사용하는 소수집단 구성원들의 끈끈한 점성을 높여주고 남들은 읽어낼 수 없는 이런 배타성 때문에 그들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누군가 연꽃을 가리키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손가락질에 희미하게 웃는다면 이 또한 고도의 메타포가 될 것이고 두 사람의 희열은 최고조에 이를 것이다. 비록 언어는 증발되어 버렸지만.

 

시인들이 그렇다. 타고난 능력 탓에 쉬 길어 올렸든 오랜 시간 하나의 경험을 끌어안고 뒤척이다 마침내 깊은 우물에서 끌어 올렸든 그들이 건져 올려 우리에게 늘어놓는 메타포는 쉬 우리의 독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걸 읽어내고 맞장구치는 독자를 만나면 진정한 만남이 드물어 외로웠던 삶에 순간적이지만 거대한 파동이 일고 자기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해석엔 말을 아끼며 고개만 주억거린다. 훨씬 커져 되돌아온 메타포에 기쁨과 당혹감이 동시에 찾아 드는 것이다. 자신이 뱉은 것은 이제 자기 것이 아니라 자위하며 더 큰 무엇이 있는 양 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때 메타포는 그들만의 유희다. 그래서 시인에게 메타포는 필수적인 소통의 도구, 아니 소통이 아니라 대상을 받아들이고 내놓는 도구다. 독자의 이해는 시인에게 중요하지 않다. 오해도 환영한다. 오해는 메타포를 더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과 읽어내는 것은 다른 즐거움이다. 어차피 메타포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존 던(John Donne)이 사랑을 컴퍼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위, 기울어짐이 완성하는 원으로 노래하고 내가 두 개의 컴퍼스 다리가 만나면 컴퍼스는 더 이상 컴퍼스가 아니라고 읽어내는 것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존 던의 컴퍼스를 점점 더 벌려가며 확장된 원을 그리는 것이다. 존 던의 컴퍼스를 더 벌려 볼까? 사랑의 범주는 점점 더 커지겠지. 그러나 완전히 벌어지면 원을 그리지 못한다. 붙어도 안 되고 너무 벌어져도 안 된다. 사랑은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니 메타포는 일단 태어나면 성장하는 유기체가 된다.

 

그러나 메타포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짧다. 삶을 소풍이라 바보같이 웃던 천상병의 메타포는 이제 너무 식상해 메타포로서 생명을 잃었다. 다시 살리려면 좀 격이 떨어져도 살을 입혀야 한다. “도시락 두고 온 소풍.”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의 메타포도 마찬가지다. 또한 모든 비유는 위험하다. 도저히 등치시킬 수 없는 것을 포개 놓으니 문제가 발생한다. 의도하고자 하는 것만 뽑아 확대해 놓으니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다.

 

아직도 확장성 있는 메타포와 생각을 뒤집어 주는 아이러니에 강하게 끌리지만 요즘 메타포를 벗어나는 곳이 우리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거란 생각도 든다. 중국의 한 선승이 부처는 서 근의 삼이라 정의하였는데 부처뿐이겠는가. 삶은 서 근의 삼.” 삶은 똥바가지.” 메타포의 가면을 쓰고 메타포를 벗어난다. 쉬 이해할 수 없는 연결. 이해하려 애쓰면 바보. 언어로 붙잡을 수 없어 눈에 들어오는 아무거나 손가락질했을 뿐인데 거기에 시선을 집중한다면 눈뜬장님. 삶에 경계가 있으랴만 헛손질이라도 경계 비슷한 것을 만나 득득 긁으며 살았다면 훗날 우리 손에 삶의 메타포 하나쯤 들려있겠지. 하나 텃밭 갈무리하다 쥐어 든 돌덩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저 툭 던져버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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