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범의 우수마발10] 어떤가요, 그댄?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1/06/23 [15:05]

[윤관범의 우수마발10] 어떤가요, 그댄?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1/06/23 [15:05]

 

 

어떤가요, 그댄?

 

▲ 같이 살아도 해갈되지 않던 목마름. 이런 갈증이 영원하길 바랐으나 첫 아이가 선물처럼 태어나고 루 살로메는 다시 내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버렸다. (칼럼 내용 중)



내 앞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 이어 부스럭거리는 소리. 나는 시험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카다피의 연설을 영어로 옮기는 데 집중했다. 대학원 학비를 보탤 요량으로 파트타임 입사시험을 보는 중이었다. 잠시 후, “사전 좀 빌려주실래요?” 나지막했지만 단단한 목소리, 동시에 시야에 들어온 흰 손가락. 사전을 밀어주며 손가락을 따라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그 찰나의 감정을 사랑 아닌 다른 것으로 명명할 수 없다. 검은 폴라, 흰 얼굴, 무엇보다 눈.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낯익은, 낯익지만 새삼스러워 아 저렇게 생겼구나!’ 흘낏 일별이었지만, 아마도 무표정했을 내 시선이었겠지만 시험 보는 내내 난 무중력 상태였다.

 

이후 몇 번의 우연이 우릴 다시 만나게 했고 100일 동안 매일 만난 뒤 최루가스 매캐한 5월 우린 혼배성사 했다. 당시 오래 사귀던 여자 친구도 있었지만 항상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있던, 너무 깊어 잊고 있었던 루 살로메를 만났으니 나로서는 배신도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살아도 해갈되지 않던 목마름. 이런 갈증이 영원하길 바랐으나 첫 아이가 선물처럼 태어나고 루 살로메는 다시 내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버렸다. “모든 사랑은 비극에 기초를 두고 있다.” 루 살로메의 냉철한 목소리가 안녕을 대신했다. 사랑의 자리에 일상이 들앉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사랑한다 했지만 떨림이 사라진 사랑이었다. 하기야 안정된 일상이 아니면 아이는 누가 키우겠냐만.

 

어쩌면 우린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심어놓은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는지. 밀란 쿤데라는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했는데 이미지가 메타포 아니겠는가. 추상적인 이미지는 일상을 팽개치고 사랑할 수 있으나 상대방의 구체적인 날것의 언행은 사랑하기 힘들다. 보이지 않는 이웃은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막상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이웃은 사랑하기 힘들다.

 

너무 비관적인가? 그렇다면 예수가 길게 사랑을 정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너무 드물어 우리가 따르기엔 잔인한 조건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은 우리 모두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라는 테두리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가 내 안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을 시작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흙을 덮고 있는 씨앗 한 톨. 그 작고 단단한 웅크린 원형(原型)에서 사랑은 발아되고 어느 순간 흙을 헤집고 나와 안과 밖을 연결하는 것이다. 햇빛과 바람과 비, 씨앗 속 이미지엔 존재하지 않았던 무수한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랑은 설렘으로 확 불타오르다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끝나면 그제야 대상을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떨림이 사라진 곳에서 진정 사랑은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떨림 없는 과정이 어디 있고 과정 속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우리의 인식이 그에 미치지 못할 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노라면 그 과정마다 떨림은 증폭되어 우리 인식 안에 들어오지 않을까? 그러면 사랑은 먼 훗날 짙은 그늘 드리운 커다란 나무 되어 많은 것들이 그에 기댈 수 있겠지.

 

이를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빠르고 얕은 계곡물같이 시끄러운 우리들의 사랑이 커다랗게 뿌리 내린 나무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이 메말라도 일상의 관성이 우리의 촉감을 무디게 하고 약삭빠른 셈법으로 시든 사랑을 못 본 체한다. ()이라 달리 부르며 자위하기도 한다. 스스로 사랑의 범주를 축소시키며 형편없이 쪼그라든 우리의 사랑법을 변호한다.

 

이제 사랑하지 않음을 정()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정은 다시 사랑이 된다. 사랑이 나의 이미지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미지의 변형을 받아들이려면 나의 테두리를 넓혀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아야 하리라. 그렇게 자꾸 경계를 허물다 보면 세상에 사랑이라 이름 붙이지 못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란 호칭도 쓰임새가 끝날 터이니 이 세상은 사랑만 가득한 채 사랑의 인식은 없어질 것이다. 돕는다는 의식도 없이 많은 것들에 자리를 내어주는 커다란 나무처럼.

 

하지만 이제까지의 사변(思辨)도 협소한 내 안의 이미지 아닐까? 얼마 전 실수로 우리 집 통신선을 끊어버린 이웃의 몰상식한 반응에 벌컥 화를 낸 적이 있다. 움찔하며 사과하는 이웃의 표정에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분명해졌다. ‘건드리면 안 될 놈이군.’ 내가 갖게 된 새로운 무기. 그리고 한순간에 다시 쪼그라든 나의 테두리. 쪼그라들긴 한 걸까? 애초부터 확장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지점에서 사랑에 대한 나의 되새김은 다시 시작된다. 이렇게 사랑은 거듭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사랑은 이제 막 퍼져 나가는 듯하다가 다시 원위치. 다만 루 살로메는 이제 내 안에 없으니, 그래도 설렘은 시도 때도 없이 돋아 나를 흔들고 있으니 이전보단 좀 나아지려나?

 

어떤가요, 그댄? 당신도 나와 같나요?’ 넬의 소곤거림에 이 저녁 다시 나는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 많은 얼굴이 스친다. 하나하나 스쳐 가는 얼굴에서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떨어낸다. 붉은 노을에 얼굴을 붉히며.

 

▲ 그 흔들림 속에 많은 얼굴이 스친다. 하나하나 스쳐 가는 얼굴에서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떨어낸다. 붉은 노을에 얼굴을 붉히며. (칼럼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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