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교수의 영미단편소설 읽기5] 낭만적 연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

-키쇼의 “사랑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Love)

남정현 기자 | 기사입력 2021/01/08 [15:30]

[김선옥 교수의 영미단편소설 읽기5] 낭만적 연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

-키쇼의 “사랑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Love)

남정현 기자 | 입력 : 2021/01/08 [15:30]

 

낭만적 연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

-키쇼의 사랑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Love)

 

 

▲ 동화나 어린이 소설에 주력한 키쇼는 자신의 사진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위 사진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블랜포드 중위의 이미지 (사진 출처=Google) 

 

“66분 전”(Six minutes to six). 유대계 미국 작가인 키쇼(S.I. Kishor 1896-1977)의 짧은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2차 대전 무렵, 전쟁이 끝났는지 불확실한 가운데 전투기 조종사였던 블랜포드 중위(Lieutenant Blandford)는 긴장된 얼굴로 뉴욕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 안내소 위에 걸린 시계를 초조하게 올려다본다. 그의 손에는 서머셋 모옴(Somerset Maugham)의 소설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가 들려 있다. 6시에 만나기로 한 여성은 그 책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볼 것이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지만 전장에 있던 지난 13개월간 자신을 위로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서 살아남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여성,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의 감정을 확신하기도 했었다. 6시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린다.

 

이것은 아날로그 시대의 관계 맺기이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순식간에 지구의 반대편에 사는 사람과 얼굴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는 존재할 법하지 않은, 그래서 낯설지만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과거의 이야기다.

 

80년대 이전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펜팔을 맺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그 설레는 느낌을 기억하리라. 시차를 두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다가 느낌이 통하면 사진으로라도 외모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 글을 통해 받은 느낌과 전혀 다른 사람일까 걱정스러우면서도 대개는 설레는 마음으로 사진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블랜포드 중위도 그러했다. 신병 훈련소에서 발견한 인간의 굴레안에 여성의 필체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사려 깊은 메모들에 이끌려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책 뒤에 붙은 장서표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홀리스 메이넬(Hollis Meynell). 뉴욕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주소를 알아낸 뒤 무작정 편지를 썼는데 그녀가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한 펜팔은 전쟁터에서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을 털어놓고 그녀의 사려 깊은 공감과 격려로부터 용기를 얻을 만큼 친숙한 관계로 발전했다. 이쯤에서 그가 사진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단호히 거절한다. 거절하는 그녀의 답변이 명언이다.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어떤 진실성과 정직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단지 그것 때문에 한 번 모험삼아 시도해보는 거라는 느낌을 떨쳐 버리기 어려울 거예요. 그런 종류의 사랑은 나를 역겹게 합니다. 내가 평범하게 생겼다고 가정해보세요. (이게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요.) 그러면 난 당신이 단지 외롭고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한테 계속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생길 거예요. 아니, 사진 보내 달라고 요청하지 마세요. 당신이 뉴욕에 오면 날 만나게 될 테고, 그때 당신은 결정을 내리게 될 거에요. 기억하세요. 우리 둘 다 거기서 끝낼지, 아니면 계속 관계를 이어갈지 어느 쪽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If your feeling for me has any reality, any honest basis, what I look like won't matter. Suppose I'm beautiful. I'd always be haunted by the feeling that you had been taking a chance on just that, and that kind of love would disgust me. Suppose I'm plain(and you must admit that this is more likely). Then I'd always fear that you were only going on writing to me because you were lonely and had no one else. No, don't ask for my picture. When you come to New York, you shall see me and then you shall make your decision. Remember, both of us are free to stop or to go on after thatwhichever we choose‥‥

 

남녀관계에서 서로를 향한 진실한 감정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이성을 갈망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은 없기에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이끌린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정해지기 쉽다. 메이넬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더 이상 아름답지 않게 될 시간들은 어쩔 것인가? 혹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언제나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려고 노력해야 한다면 그 사랑은 또 얼마나 피곤하고 불안한가. 메이넬의 말대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진실하고 정직하다면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교과서적인 사랑의 진리가 현실 속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녀관계에서 감각에 기초한 감정은 종종 이성을 압도한다. 이성을 향한 이끌림은 머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해도 상대방의 외모가 충격적이라면 그로 인해 순식간에 감정이 변화될 수도 있다. 그 변화된 감정을 대하는 방식은 각자의 인격을 드러낼 것이다.

 

6시 정각, 자신이 몰던 전투기보다 더 높이 심장이 뛰어오를 무렵 블랜포드 중위 앞으로 외모가 매우 다른 두 여성이 나타난다. 연두색 정장을 입고 나타난 첫 번째 여성은 그의 이성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킬 만큼 아름다운, 봄의 여신과도 같은 싱그러운 젊은 여성이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저절로 움찔하던 블랜포드는 한순간 메이넬의 존재를 확인해줄 장미꽃이 옷깃에 없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 그런데 도발적인 미소를 띠며 지나가는 젊은 여성 바로 뒤에서 그는 회색 머리를 낡은 모자 뒤로 밀어 넣은, 몸집이 뚱뚱한 40대 중년의 홀리스 메이넬을 보게 된다. 그녀의 구겨진 옷깃에 미리 약속한 장미꽃을 달고 있었기에 한순간에 그녀가 메이넬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분명 사랑의 감정을 확신했건만 실망감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블랜포드, 봄의 여신을 따라가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강하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 외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진 출처=Google)  © 남정현 기자



블랜포드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의 감정을 키우며 오매불망 만나기만을 기다렸던 그녀 혹은 그가 당신의 기대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요즘 인터넷에서 인기 있는 데이트 사이트나 앱은 사진이나 화상 채팅으로 미리 외모를 확인할 수 있다 해도 막상 만나보면 얼굴뿐만 아니라 여러 신체 조건이 예상과 달리 매우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어쩔 것인가?

 

수업 중에 한 학생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블랜포드 상황에 처한다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도망갈 거 같다고 말했다. 솔직한 답변에 모두 웃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내가 알고 지내던 한 남성은 젊은 시절 소개팅에 나갔는데 우락부락한 여성이 앉아 있어서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몰래 도망쳤다고 했다. 농담이라 여기며 웃었지만 어쩐지 씁쓸하고 언짢았다.

 

블랜포드는 도망치지 않는다. 자신보다 훨씬 연상으로 보이는 메이넬의 외모에 마음이 찢어질 듯 실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시간 그의 영혼과 함께한 여성에 대한 감정도 진실한 것이었기에 사랑보다 소중한 우정이라 여기며 그녀 앞으로 자신을 증명할 인간의 굴레를 내민다. 그 순간 동화의 마법처럼 반전이 일어난다. 작품을 읽게 될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여기서 내용을 소상히 밝힐 수는 없지만 모종의 인간성 테스트와 관련된 반전이라 할 수 있다.

 

남학생들은 여성의 테스트를 불쾌하게 여겼다. 편지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진실한 감정을 느꼈는데 상대방을 믿지 못하고 인간성을 테스트하는 것은 불순하다고 했다. 그러나 삶의 동반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테스트나 세심한 관찰로 상대방의 인성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낭만적 감정은 종종 우리를 눈 멀게 만들고 잘못 엮어진 남녀관계는 폭력과 죽음마저 불러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인성 테스트를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내세울만한 어떤 것도 지니지 못한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보통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가의 여부를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아름다움은 시간과 더불어 소실되고 낭만이 걷힌 뒤에 남는 것은 현실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낭만이 걷힌 현실 속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아껴줄 가능성이 그만큼 높지 않겠는가. 키쇼의 “Appointment with Love”는 세 쪽 분량의 짧고 쉬운 작품이니 구글에떠도는 오역 섞인 번역본이나 축약본 말고 꼭 원작으로 읽어보시길!

 

 

칼럼니스트: 김선옥 교수 (원광대 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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